머리는 안 굳어요. 굳는건 내 생각입니다.
아, 이 책을 이제서야 알게되다니!
미리 알았더라면 필자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책을 항상 읽게 하여 사고의 폭과 깊이를 키워줬을텐데. 그렇지만 아직 후회하기엔 늦지 않았다. 40대인 필자도, 학원 숙제와 온라인 게임에 시간을 할애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머리가 굳는다구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계속 공부한다면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을 기른다면, 세상의 다양하고 깊은 생각들을 접하고, 지식을 섭렵함으로써 본인의 생각도 유연해질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 명문가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적용해온 '독서 교육'에 대한 책이 있기에 소개를 해본다.
* 저자 : 최효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비교문학) 학위를 받았다. 17년간 신문기자로 일했다.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있으며 학부대학 우수강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자녀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명문가의 위대한 유산’을 주제로 강의
한국경제신문과 한경비즈니스에 수년간 독서칼럼 연재.
매일경제신문 매경이코노미에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 연재.
독특하고 열정적인 글쓰기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선정한 ‘한국의 저자 300인’에 선정.
작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영국 500년 명문가라는 '처칠가'의 독서교육에 대해 요약해보고자 한다.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고, 아버지는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윈스턴 처칠은 총리를 두 번이나 지냈다. 그는 31세에 차관이 된 후, 34세부터 상무부 장관을 시작하여 내무부, 해군부, 군수부, 육군부, 식민부, 재무부 등 7개 부처의 장관을 거쳐 총리를 두번이나 지냈다. 또 아버지 랜돌프에 이어 재무장관을 5년 동안 역임했는데 영국 역사상 가장 수명이 긴 재무장관으로 기록된다.
매일 5시간씩 독서를 했던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은 매일 5시간씩 책을 읽었던 독서 예찬론자다. 그의 독서에 대한 조언은 다음과 같다.
“이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다. 최소한 만지기라도 해라.”, “쓰다듬고, 쳐다보기라도 해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거나 눈에 띄는 구절부터 읽기 시작하는 거다”
이러한 방법은 책에 대한 거리감을 좁혀주며 책을 멀리하는 사람에게도 쉬운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칠은 수상록 "폭풍의 한가운데서"에서 언급한 구절을 통해 책을 가까이 하라는 조언을 남겼다.
책은 친구가 되지 못하더라도,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좋다. 책이 당신 삶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알고 지낸다는 표시의 눈인사마저 거부하면서 살지는 마라.
자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또한 독서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처칠의 말마따나 읽지 않는 책이라도 가까이에 두고 눈에 띄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대개 집안 곳곳에 책을 쌓아놓으면 와이프의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거실에 책장을 놓거나 TV 대신 스탠드에 다양한 읽을 거리들을 올려놓는다면, 오며가며 손에 들게 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처칠은, 책은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서한 내용 중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언젠가 처칠은 중요하다는 책은 다 읽었노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깊이를 느낄 수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 있는 정신작용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독서는 오히려 빈 수레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젊은이가 독서를 할 때나 노인들이 음식을 먹을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양쪽 모두 너무 많이 먹지 말 것이며, 잘 씹어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처칠 본인은 다독가였지만,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 속에서는 짧은 글이라도 '정독'하기를 권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정치가이면서도 베스트셀러로 읽혀지는 "폭풍의 한가운데", "나의 청춘기"를 쓸 수 있었던 데에는 방대한 독서량뿐 아니라 읽은 내용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한 “생산적인 독서” 덕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1953년)이라는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가 쓴 책에서 드러나는 번뜩이는 혜안과 지혜는 다름아닌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 온 독서를 통해 길러진 필력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추세대로 개발이 진행되면 머지않아 무선 전화와 무선 텔레비전도 등장해서, 기기만 들고 다니면 연결할 수 있는 처리가 되어 있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방과 쉽게 통화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초고속 통신 수단이 현실화되는 날에는, 아주 친한 친구들을 만나는 경우 이외에는 거의 실제로 사람들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 폭풍의 한가운데
"50년 후의 세계" (1931년)라는 글에서도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폴 샤피로의 "클린 미트(Clean Meat)"라는 책에서도 언급된다.
1931년,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50년 뒤의 세계 Fifty Years Hence"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가슴이나 날개를 먹기 위해 닭을 통째로 키우는 모순에서 벗어나 적절한 배양액 내에서 부위별로 닭을 키우게 될 것이다.”
이 거짓말처럼 황당했던 예언은 70여 년이 흐른 21세기 초입에서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녹색 혁명 이후 차세대 식량 혁명인 세포농업의 태동을 목격하고 있다.
지금도 읽히는 고전이 된 것은 그의 깊이 있는 독서에서 비롯된 내공 덕분이다. 처칠이 쓴 책에는 수많은 지혜와 역사의 교훈이 담겨 있어 리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로 평가되고 있다.
아버지마저 포기했던 둔재가 책을 통해 변하다
처칠의 아버지가 그에게 선물로 준 책 한 권이 그가 독서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내게 기쁜 일이라면 오직 책 읽는 일이었다. 내가 아홉 살 무렵, 아버지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주셨는데, 이 책을 아주 열중해서 읽던 생각이 난다.
그는 특히 역사책과 세계 위인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다. 역사와 전기를 많이 읽은 독서이력은 훗날 리더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관학교에 들어간 처칠은 공부하지 않고 말썽만 부리며 돈만 달라던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단정한 용모에 예의 바른 아들이 되어 있었고, 흡족해진 아버지는 그를 정치 지도자들과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젊은이들에게 소개했다. 이들과의 만남이 훗날 그에게 큰 자산이 되었고, 아들의 사관학교 공부에 필요한 책이면 무엇이든 보내 주었다. 둔재였던 처칠이 공부에 전념한 데에는 아버지가 보내준 병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초중고 시절에 라틴어와 수학 등 싫어하는 과목 탓에 공부에 흥미를 읽어 꼴찌를 맴돌았지만, 사관학교에 진학한 후 흥미를 느끼는 과목을 공부했기 때문에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독서습관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가 독서를 즐기던 침대 위에는 항상 책이 놓여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200페이지 가량을 읽었다.
아버지의 책선물과 손편지 영향
처칠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책을 보낼 때마다 편지를 함께 보냈다. 훗날 처칠은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편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가 손수 정성 들여 써 보내 준 편지의 어느 것을 지금 읽어 보아도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걱정해 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리 고마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때문에 더욱 섭섭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될 때까지 아버지가 살아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훗날 깨닫긴 했지만 아버지의 편지는 함께 보내 준 책만큼이나 효과적이었는지, 고등학교 시절 만년 꼴찌였던 처칠이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150명 중 8등으로 졸업했다. 사관학교에서의 대변신 덕분에 처칠은 마침내 영국의 총리이자 세계적인 지도자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처칠이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1895년 처칠이 장교로 임관한 이듬해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스물한 살이었던 처칠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는 1월 24일 새벽에 돌아가셨다. 나의 모든 꿈, 즉 아버지의 동지가 되어 의회에서 옆자리에 앉아 아버지를 지원하는 것은 끝장이 나고 말았다. 나에게 남겨지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그의 명성을 지키는 것이다.
정치계에 입문한 처칠은 "로마제국 쇠망사"(애드워드 기번)를 수없이 반복해서 읽으면서 역사의 도전을 직시했다고 한다. 그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명장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영국과 세계를 구할 수 있었던 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보물섬"과 "로마제국 쇠망사" 등 즐겨 읽은 역사책들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달변, 달필의 근원은 독서
처칠에게 제 1의 필독서였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아버지의 애독서이기도 했다. 처칠은 아버지가 "로마제국 쇠망사"를 애독하고 있었고 몇 페이지에 어떤 문장이 있는지까지 암기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연설을 하거나 글을 쓸 때 큰 영향을 준 것도 이 덕분임을 알고 있었다.
처칠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으면서 마음속에 새길 만한 글이 나오면 암송하고 또 암송했다. 그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문구가 나오면 암송하기를 즐겼는데 이것은 후일 정치가 시절에 뛰어난 연설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또한 마음에 드는 인용구를 노트에 옮겨 적는 습관 덕분에 좋은 글을 쓰고 명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멀리 되돌아볼수록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다.”
이 말은 처칠이 남긴 명언 중 하나로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역사서와 전기를 좋아했던 처칠은 누구보다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글쓰기까지 연결시켜 "세계의 위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집필하였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면 실수로부터 도움을 얻고, 가장 현명한 판단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경우가 흔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는 처칠의 글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얻은 교훈일 것이다.
처칠은 “즐길 수 있는 취미가 2개 정도는 있어야 교양인이 될 수 있다.”고도 말했는데, 그가 틈틈이 취미로 그린 그림이 500점에 이른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이유는 그 시간만큼은 침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 늘 연설을 하고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때만큼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림 그리기와 더불어 또 다는 취미는 바로 다방면의 독서였다. 처칠은 역사서나 문학서뿐 아니라 시도 즐겨 읽었다. 특히 영국 시인 앨프리드 애드워드 하우스먼의 시를 좋아했는데 "내 나이 하나 하고 스물이었을 때"를 즐겨 암송했다.
스승과도 같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고, 뛰어넘어 위인으로 칭송받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처칠. 그의 뒤에 있었던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그가 매일 매일 읽고 암송했던 역사적 위인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각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달려있다. 그 생각에 따른 행동은 사람들마다 다른 미래를 가져올 것이다.
아직 안 늦었다.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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